I.

과거에는 문인, 학자, 예술가들은 이름 외에 별칭으로 아호(雅號)를 가졌다. 흔히 집안 어른이나, 스승 혹은 친구들이 지어서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호에는 자신의 인생관, 좌우명, 출신(지), 선호 등을 담았는데, 많은 이가 2종 이상의 아호를 가졌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김정희(金正喜)는 추사(秋史)를 비롯하여 완당(阮堂)ㆍ시암(詩庵)ㆍ예당(禮堂)ㆍ노과(老果) 등 200여개(일설에는 503개)를 가졌다. 단연 기록보유자가 아닐까 한다. 그런가 하면, 김소월(金素月 김정식), 김영랑(金永郎 김윤식), 이육사(李陸史 이원록), 박목월(朴木月 박영종) 등 한국의 대표 시인들은 우리에게 주로 아호로 기억되고 본명은 거의 잊혀졌다. 역시 천하의 묵객들에게는 돌림자를 따라 정해지는 본명보다 자신의 숨결이 감도는 풍아(風雅)한 아호가 제 격이 아닐까 한다

 

우남(雩南 이승만), 백범(白凡 김구), 해공(海公 신익희), 인촌(仁村 김성수), 몽양(夢陽 여운형) 등 한국 현대사의 이름있는 정치인들도, 본명 보다 아호로 불릴 때 우리에게 그 정치적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한글학자 주시경(한뫼), 최현배(외솔), 허웅(눈뫼)은 아호를 순수 우리말로 지어 우리의 얼을 아로새겼고, 사상가 함석헌은 아호를 씨알, 바보새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옹기로 지어, 민초(民草)를 연상케 하는 토속적 은유를 통하여 자신의 추구하는 세계관을 담았다.

 

                                    II.

 

아호가 때로는 짓궂은 유머로 혹은 풍자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선생(1892-1968)이 하루는 가까이 지내는 정인보(鄭寅普)선생(1893-1950)를 찾아, 위락당(爲樂堂)이라는 아호를 권했고, 정인보 선생은 이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 후 얼마 후, 가람선생이 정인보 선생을 다시 찾아 크게 웃으면서, “여보게, 자네 아호를 거꾸로 읽어보게!”라는 것이 아닌가. 거꾸로 읽으면, ‘당나귀’가 되는데, 워낙 정(鄭)씨 성(姓)이 당나귀를 뜻하기 때문에 이에 빗대어 놀려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일은, 정인보 선생이 크게 놀림을 당하고도, 가람이 건네 준 아호 위락당에서 가운데 ‘락’ 자만 빼고, 자신의 호를 위당(爲堂)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국학의 대가, 두 분이 아호를 둘러싸고 주고받은 수 싸움이 역시  고수답지 않은가. 무엇보다 끝내 서로를  격의없이 품에 안은 그 결말이 너무 아름답다.

 

                                    III.

 

우리 앞 세대만 해도 아호를 지닌 분들이 꽤 되었던 것 같은데, 우리 세대에 이르러는 이미 아호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문인, 학자, 예술가 들 가운데 아호를 가진 사람도 드물거니와, 아호를 지녀도 누가 기억하고 불러주는 이가 별로 없어 그냥 사장(死藏)되기가 일쑤이다. 

 

나는 일찍부터 아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도 않았다. 또 마음 한 구석에 아호를 갖는 것  자체가 괜히 잰체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 때문에 따로 아호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약 30 년 전에 영남 제일의 서예가인 청남(菁南) 오재봉 (吳濟峰) 선생(1908-1991)께서 내게 손수 ‘현강(玄岡)’ 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셨다. 내 제자 한 사람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청남 선생은 나를 한번 만나 보신 후, 따로 청을 드리지도 않았는데, 손수 아호를 지어 내게 보내셨다. 고맙게 그지없었다. 음과 뜻 모두 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은밀하게 가슴에 안았다.

 

이후 10여년 지나,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나는 새로 지은 집을 현강재로, 그리고 새로 개설한 블로그 역시 현강재라 부르면서, 은연중에 내 아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 좋아서 읊조리는 수준이지, 아호를 뭇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장광설(長廣舌)하거나 많은 사람이 불러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IV.

그러면서 내심으로 적어도 가까운 친구나 제자 몇 명 정도는 내 아호를 기억하고 장난스레 불러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작은 기대마저 산산이 깨졌다. 내 아호가 공개된 지 10여년이 지나도 나를 현강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미 아호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절감했다. 보다 직설적, 직면(直面)적이고 단순화, 명료화를 지향하는 오늘의 세태에서 얼마간 여유를 가지고, 넌지시, 조금은 은밀하게, 그리고 뭔가 함축성을 지니며 은근히 다가가는 아호 접근법은 전혀 맞지 않는 게 분명하다. ‘현강재’는 그냥 안병영의 불로그 이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안병영이라는 공식적 명칭 이외에 어찌보면 그 이름보다 더 의미 있는 인간의 총체성, 즉 그의 꿈이나 인격, 인간적 향기를 표상하는 또 하나의 의미복합체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불현듯 김춘수의 ‘꽃’이 연상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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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수장을 정치희생양 삼다니

 

“이렇게 1년 만에 교육부총리가 바뀌면 교육정책을 장기적으로 소신있게 추진하기가 어렵습니다.” “국민들은 백년대계를 원하는데, 권부는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교육수장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이래서야 정책이 어떻게 일관성을 유지하겠습니까.”

4일 오후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이임식이 끝난 후 교육부 공무원들은 신임 부총리에 대한 예우 때문에 말을 아끼면서도 장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이날 이임식에서 안 전 부총리는 “너무 모질게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 여생 동안 빚을 다 갚지 못하겠지만 밖에서 열심히 돕겠다”고 간단히 말을 마쳤으나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대부분의 직원들과 기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안 부총리는 그동안 직원들로부터 ‘워커 홀릭(일 중독자)’이란 표현을 들어가면서 사교육비 경감, 대입제도 개선, 대학구조 개혁, 교원평가제, 직업교육 개편 등 각종 교육개혁정책을 추진해왔다. 직원들은 그로부터 “장관이 밤잠을 못 자는데 여러분들은 잠이 오느냐”는 소리를 일상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직원들은 떠나는 부총리에 대해 눈물로 아쉬워했다.

“안 전부총리의 중도 통합 노선은 진보, 보수로 나뉘어 갈등을 보이고 있는 교육단체의 조정 역할을 나름대로 해 냈습니다. 김영삼 정권에서 교육부장관을 지냈던 경륜으로 교육단체의 협조도 쉽게 이끌어냈습니다. 앞으로 그게 가능할지 솔직히 걱정입니다.” 한 교육단체 대표는 이렇게 우려를 표명했다.

안 전 부총리는 이임식에 앞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각 시·도교육청이 관할하는 수능은 교육부총리에게 직접 책임이 없는데 그 이유로 교체하는 것을 수긍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교육수장이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고 대답했지만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교육계 안팎에서는 “교육수장 교체 이유가 교육정책 실패 때문이 아니라 수능 부정에 대한 국민정서를 달래기 위해서라면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이라는 비판 여론이 높다.

더욱이 새 부총리 인선 과정에서 대안 부재가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이를 강행한 것은 참여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을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교육부의 한 고위 직원은 “새 교육부총리가 기초 업무를 파악하는 데만 최소한 6개월이 걸릴 텐데, 그 이후에 돌출 사건이 발생하면 민심 수습 이유로 또 교체할 것이냐”며 한숨을 쉬었다.

 

            장재선기자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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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산책

포토갤러리 2020. 11. 17. 16:12 |

마지막 치과 진료를 마치고 인근 창경궁을 찾았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시기적으로는 때늦은 단풍이 아직 아름다음을 뽑내고 있었다. 혼자 고궁을 산책하며 옛 추억을 더듬었다.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그 때 그 시절, 너나없이 즐겨 찾았던 창경궁을 까맣게 잊고 사는 서울시민들에게 창경궁 산책을 권한다. 이제 동물원구경, 뱃놀이, 밤벗꽃놀이는 없어졌지만,  도심 한가운데 옛 추억을 일깨워 주는 이런 고풍서린 격조높은 공원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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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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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풍을 보려고 한계령을 찾았으나, 거기에는 이미 초겨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휴게소는 만추의 한계령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내려오다 오색에 이르니 그런대로 단풍이 좀 남아 있었다.

집에 돌아와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래다가

 

문득 눈앞을 보니 명품 불루베리 단풍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정작 내가 찾던 늦가을 정취는 집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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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로터리

포토갤러리 2020. 10. 29. 03:52 |

 명륜동 치과에 가는 길에 혜화동 로터리에 들려 청소년기의 옛 추억을 더듬었다. 

<동양서림>이 반세기 넘어 옛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 옆에 약국도 여전히 거기 있었다.

    혜화동 성당 쪽

             동성고등학교 쪽

시인 조병화가 <나의 터미널>이라고 불렀던 혜화동 낭만의 정점, 추억의 로터리 버스 정류장. 

 중국집 <금문>도 여전했다. 그 옆  대학시절 우리 친구들이 자주 찾았던 <전원다방>은 A Twosome Place로 이름이 바뀌었다.

  잠시 들려 커피 한잔을 하며 옛 친구들을 그리워 했다. 그 중 많은 이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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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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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작년으로 기억된다. 속초에 사는 지인 두 분과 점심을 했다. 두 사람 다 나와 동년배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속초/고성으로 내려와 노년을 보내는 분들이다. 이곳에서 처음 만났지만, 한국사회의 인간관계가 늘 그렇듯이 따지고 보면 친구의 친구들이고, 한국 현대사의 온갖 풍파를 함께 겪으며 동시대를 함께 살아 왔기 때문에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호간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나면 가끔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어린 아이들처럼 자주 “그랬지”, “그 때 그랬었지” 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면서 때로는 함께 기뻐하거나 감탄하고, 때로는 비분강개하거나 안타까워 할 때도 많다.

그날도 이런 저런 얘기를 꽃피우는 가운데, 그 중 한분이 느닷없이 “안 교수님, 교수님은 평생 꽃길만 걸으셨지요”라고 내게 물었다. 그러자 다른 한 분도 곧, “그렇지요. 일생 순탄하셨잖아요”라며, 거들었다. 순간 나는 얼마간 당황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분들 말씀에 내심 얼마간 반발이 느껴졌다. 그래서, “꽃길이라니요. 제 인생도 그렇게 녹록치 않았습니다” 라며 얼버무렸다.

II.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꽃길’ 질문이 계속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내 지난 생애가 꽃길이었던가 아니면 가시밭길이었던가. 그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꽃길‘을 넉넉한 가운데, 여유 있게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그리고 즐기며 사는 인생여정으로 정의한다면, 나는 분명 그런 삶을 살지는 않았다. 내 생애의 대부분은 무척 힘겹고 팍팍했고, 늘 바삐 쫓기며 살았다. 세속적인 사치나 쾌락을 탐하거나 누리지도 않았고, 여유를 즐길 겨를도 없었다. 항상 숨이 목에 차있었다. 그래서 정년 이전의 내 삶을 되돌아보면 지겨울 정도로 힘들었다는 생각부터 든다. 오죽 힘겨웠으면, 20 년전 60문턱에서 내 처가, “당신, 10년 더 젊어지면 좋겠어?”라고 내게 물었을 때, 내 대답이 “아냐, 그 지겨웠던 50대를 되풀이 할 생각, 전혀 없어, 진정이야”라고 답했을까. 그런데 세속적 잣대로 볼 때, 내 50대는 대학교수로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 사이에 2년 가까이 장관까지 지냈던 내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나마 내가 얼마간 심신의 안정을 찾고 내 삶의 주인이 됐다고 느낀 것은 10여 년 전,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부터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타인들은 오히려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의 그 숨 가쁘고 고단했던 삶의 여정을, 명문대학 교수-장관을 거쳤다는 그럴싸한 경력 때문에 ’꽃길‘로 보는 것 같다.

III.

20대 후반, 외국에서 유학을 할 때 이후 나는 하루 5시간의 수면시간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중. 장년기에는 밤샘도 밥 먹듯 했다. 나처럼 재주 없고 능력도 부치는 사람이 무언가 이루려면, 잠을 줄여 남보다 더 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슨 일을 하거나 완벽을 추구했고, ‘올인’를 했다. 그러자니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이런 ‘올인’ 인생을 크게 거들어 준 것은 쾌락주의(hedonism)와는 거리가 먼 내 성벽이 아니었나 싶다. 경건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는 천성이 ‘즐기는 것’, ‘누리는 것’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다. 게다가 재주가 없어 그나마 조금 끄적이는 공부 이외에는 세상에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골프는 물론 자동차 운전도 못하고, 바둑이나 ‘고스톱’도 할 줄 모른다. 술도 거의 안하고, 노래방도 가지 않는다. 식성이 좋아 무엇이나 잘 먹어, 미식가와는 거리가 멀다. 친구를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어울리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한번은 잘 아는 선배교수 한 분이 연민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안 교수, 당신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나의 ‘올인’ 인생에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타고난 건강이었다. 평생 큰 병을 앓지 않았고, 무리를 해도 곧 회복되었다. 나이 팔십에 300평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부모님이 내려 주신 건강 때문이 아닌가 한다.

IV.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 생애의 대부분을 ‘내가 좋아 하는 일’, ‘잘하는 일’ 그리고 ‘보람되다고 느끼는 일’을 하며 살았다. 내 꿈이나 적성으로 볼 때, 세상에 별처럼 수많은 직업 중에 위에 세 박자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직업은 교수/학자의 길 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평생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큰 축복이었다. 그렇다면, 필경 그게 '꽃길'이 아니었을까. 30여 년 간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한 번도 그 일에 염증을 느끼거나,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늘 가슴이 벅찼고 자랑스러웠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느끼고, 자주 좌절했던 것은 순전히 내 능력 부족과 과욕 때문이었지,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직은 내게 아직도 성직(聖職)의 의미를 지닌다.

두 번 정부에 참여하면서, 고뇌가 무척 컸다. 그러나 그 일을 잘하면 국리민복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내 학문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개연성 때문에 그 일에 ‘올인’했다. ‘일벌레’라는 별칭이 항상 따랐다. 한번은 퇴임하는 실장 한분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내게 건넨 말이, “장관님, 조금은 즐기면서 하십시오. 옆에서 볼 때, 마치 생사를 걸고 일을 하시는 것 같아요.”였다.

V.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해서 한국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온갖 풍파를 겪으며 나이 팔십에 이르기 까지, 그래도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 보람되다고 느끼는 일을 열심히 하며 꾸역꾸역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행복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 황혼녘에 겪은 지난해 불난리를 포함해서, 그간에 있었던 온갖 힘겹고, 숨 가쁘고, 가슴 아팠던 어려운(그 때 그 때는 절체절명으로 느꼈던) 순간들도 내 생애의 큰 물줄기를 생각하면 얼마간 무리해서 한낮 에피소드들로  치부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혹시 누가 내게 다시 “꽃길만 걸으셨지요”라고 물으면, 크게 머믓거리지 않고, ''네, 그렇지요”라고 대답할 듯 하다. 물론 그 때, 묻는 이의 의도와 대답하는 내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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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20.10.25 01:0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일전에 어느 두 분으로부터 "평생 꽃길만 걸으셨지요"라는 말씀에 대하여 얼마간 내심 수궁하기
    어려웠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올리신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조마조마했는데 ~~~ 끝이 멋집니다!!!
    분명 부총리님의 "꽃길"은 "올인" 또는 "축복"의 또 다른 이름임에 틀림없는 듯 합니다!!!
    적어도 부총리님의 치열했던 '두 번의 장관직'의 뒷면을 그 두 분을 포함한 일반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그저 단순히 "꽃길"이라 하시겠죠?
    그러니 부총리님께서는 순간 좀 억울(?)하셨구요~~~ㅎㅎ

    부총리님, 외람되지만 제가 다시 대변해 보겠습니다


    "교수님은 평생 꽃길만 걸으셨지요"라는 어느 두 분의 말씀에
    순간 나는 조금 억울(?)했다
    나의 '빡빡했던 삶', '올인 인생'을 알기나 하오?

    그러나 가만히 다시 짚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 그리고 '보람되다고 느끼는 일'에
    올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큰 축복이지 않나!

    그럼 이 "축복"이라는 것의 또 다른 이름,
    곧 "꽃길"이 맞다
    그렇다 "꽃길", 큰 축복이고 올인 인생 맞다

    그 두 분의 말씀도 맞소이다!

  2. 현강재 현강 2020.10.25 07:5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고맙습니다. 내 심경을 헤아려 내 글을 잘 집약해 주셨습니다. 늘 신세만 지니. 이거 원!

  3. 현강재 현강 2020.10.26 03:5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위의 제 글을 읽고, 허욱 박사님이 구상 시인의 시 <꽃 자리>를 보내 주셨습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를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4. 김항규 2020.12.07 16:2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골프도 못치고 노래방도 잘 안가고 술도 못먹는 그렇지만 먹는 것은 아무 것이나 잘먹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들이 저에게 가끔은 콩플렉스로 느껴졌는데 교수님이 그러시다니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국궁을 배워서 매일 아침 운동겸 취미겸 즐기고 있습니다.
    그동안 학계에 중사하는 분들과만 주로 교류하다가 요즘에는 활터에서 사회의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80연세에 타고난 건강으로 잘 지내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사람들과 교류하다보면 저의 심리 경계선을 무단으로 훌쩍 침범해들어와 일방적으로 저를 단정지어 판단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꽃길을 살아왔는지 여부는 정말 주관적인 평가인데 말씀이죠.

  5. 현강재 현강 2020.12.09 05:2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교수님, 국궁을 하신다고요. 멋진 활시위를 그려봅니다.
    년말 년시에 건. 행하게요.

 

[노정권 역주행 5년] ③ F학점 맞은 '평등주의 교육정책'

'엘리트 교육' 반감에 수능등급제 밀어붙여
청와대, "1등급 7%로 하자"… 安교육, "사표 쓰겠다"

특별취재반

입력 2008.01.24 00:55 | 수정 2008.01.24 05:44

 

 

 

 

2004년 10월 25일. 등급제 수능이 핵심인 2008년도 대학입시 제도 발표를 사흘 앞둔 이날 오후 5시10분 총리공관에서 당·정·청 고위간부가 모두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9개 등급 중 1등급에 몇 %를 할당할 것이냐를 놓고 청와대·교육혁신위·열린우리당 '연합군'과 교육부가 맞붙었다. 안병영 교육부총리는 두 가지를 들고 갔다. 마음속에는 최소한 4%(60만명으로 가정할 경우 2만4000명)안을 관철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고, 호주머니에는 관철되지 않으면 던질 사표가 들어 있었다.

문재인 시민사회수석, 전성은 교육혁신위원장, 정봉주 열린우리당 의원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7%(4만2000명)를 들고 나왔다. 그것도 11%(6만6000명)안에서 양보한다고 양보한 것이었다. 11%로 하면 명문대학 입시는 있으나마나가 되는 것이었다.

격론이 벌어졌다. "거의 싸움 수준"이었다. 안 부총리와 함께 간 교육부 국장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7% 가지고 어떻게 입시용 변별력이 있을 수 있느냐고 했다. 안 부총리도 말소리가 높아졌다. 수험생 서열화를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연합군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녁 7시20분, 안 부총리는 호주머니의 사표를 대통령에게 전달해 달라면서 이원덕 시민사회수석에게 건네주고 자리를 떴다. 상황보고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이 밤새 조정에 나섰다. 결국 노 대통령은 4%안을 받으라고 지시하고 안 부총리의 사표도 반려했다.

 

안 부총리와 연합군은 이미 그 두 달 전 일합을 겨뤘다. 지방대 교수들과 시민단체 출신들이 다수 참여한 혁신위는 엘리트(수월성) 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다. 이들은 수능점수제를 폐지하고 2등급의 수능 등급제를 도입하는 방안부터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는 60만 수험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입시를 없애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와대와 혁신위는 논의 끝에 5등급으로 조정했다.

안 부총리와 교육부는 등급제를 도입하더라도 최소한 13~15등급은 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청와대 쪽 분위기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9등급을 현실적인 마지노선으로 제시,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이렇게 안 부총리가 지켜낸 '9등급제·1등급 4% 수능'조차 작년 말 치러진 대학입시에서 대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와 혁신위 주장대로 했더라면 혼란과 파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는 지난 22일 등급제 수능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발표 장면을 지켜보던 교육부 관료들은 "할 말이 없다"고만 말했다. '노무현 교육정책'의 상징인 등급제 수능은 단 한 차례의 '실험'만 해본 채 일장춘몽으로 끝났다.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24/2008012400053.html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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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발언

2004년 11월 수능부정사건이 터져 당정협의회에서 사과발언을 하고 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179540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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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

포토갤러리 2020. 9. 28. 13:00 |

화진포는 같은 고성군이지만 우리집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래도 워낙 풍치가 뛰어나고, 무엇보다 나는 그곳의  한가한 분위기가 좋아서 일년에 두어번 꼭 찾는다. 거기에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서 독특한 생태계를 조성하는 국내 최대의 호수('산호') 가 있고,  해수욕장도 무척 아름답다.  그 밖에 해양박물관, 생태박물관,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그리고 흔히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는 화진포의 성 등 볼거리도 제법 된다. 동북단의 통일전망대도 그리 멀지 않다. 

지난번 태풍이 몰고 온 쓰레기로 평소 깨끗하기 그지 없던 해변가가 많이 더럽혀졌다.  

 잔잔한 호수가 명경(鏡)같다.  마음 속까지 비춰낼 듯- 별세계에 온 느낌이다.

 지난 태풍에 호수 조망대도 일부 부서져 있었다.

물새 한마리가 호숫가를 거니는데, 자세히 보니 다리를 다쳤는지 절룩이고 있었다. 안타깝게 바라보는데, 다행히 한참 서성이더니 기운차게 날라갔다. 

 되돌아 오는 길에 거진 가까이 파도가 제법 힘차게 일고 있었다. 여성적인 호수에 비해,  바다는 분명 남성적인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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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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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두번의 교육부장관 시절을 되돌아 보며 쓴 글이다.

2_원로교수논단.pdf
8.04MB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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